자녀
나는 결혼 후에도 자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자녀가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아내와 자녀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결혼 생활은 만 3년을 지나고 있었고 우리는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언제나처럼 충동적이지만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게 자녀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만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과 시련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아내의 말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아내가 처음 임신 소식을 전화로 알려주었는데 나는 그때 투자유치을 위해 벤처캐피탈과 미팅을 마친 직후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감격이나 행복감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아이가 세상 밖에 나오기 전까지 무언가를 성취해 놓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투자유치를 목표한 시간 내에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당시의 나에게 자녀는 현실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임신
고백하건대 아내의 임신기간 동안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내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못했다. 아내가 뭔가를 요청하면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움직이는 정도였다. 늘 사업으로 바쁘다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기 바빴다. 그럼에도 아내는 참으로 씩씩하게 출산을 준비했다. 아이를 낳을 준비와 맞을 준비를 스스로 해냈다. 출산일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지만 나는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종종 느껴지는 태동에도 나는 쉽사리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출산에 대한 감정은 사회적 학습 효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탄생
아내와 의사가 분만실에 들어가고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장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쁘고 벅찬 감정보다는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이었다. 간호사는 나에게 아이를 보여주며 상태가 정상임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몸 전체에 태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너무 작고 말랐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큰 소리로 울었고 당황한 나머지 소변을 봤다. 나는 천에 싸인 아이를 어설프게 안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후에 출산한 아내를 볼 수 있었다. 아내는 좀처럼 가엾어 보이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날만큼은 대견하기도 하면서 가엾어 보였다. 아내와 함께 회복실에 있는데 간호사가 아이를 데려왔다. 그 회복실이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함께 한 공간이었다. 아내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시간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참 어색하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신생아
병원과 조리원의 시간을 지나 태이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지나고 나서 알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집이 최고다. 조리원에서 우리 가족은 충분히 쉬지 못했다. 아내는 태이가 집에 오기 위한 준비를 많이 해 놓았었다. 창피하게도 나는 여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그 모든 짐을 맡긴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무감각하고 불성실한 인간이 되었는지 참 의문스럽다.
태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인간이 이렇게 작은 상태에서도 동작한다는 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했다. 너무 작아서 몸의 모든 부위에 손을 대고 만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하루 종일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나는 태이를 돌봄 역할 분담을 기가 막히게 해냈다. 수면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런 다툼이 없었다. 나이 들어 아이를 낳는 것은 체력적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지혜를 통해 효율을 창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돌
태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태이의 지난 사진들을 꽤나 자주 핸드폰으로 보는데, 태이가 이렇게 생겼었나 싶을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기 어렵다. 태이가 태어나고 아내는 반복적으로 말한다. 태이의 현재와 함께하는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딸과 충만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언제나 나보다 총명한 아내의 말을 되새기며 지난 1년간 딸과의 시간을 한순간이라도 더 삶에 담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반
1년간 태이와 함께 살면서 나는 새로운 삶을 음미했다. 육아는 힘들지만 좋은 것도 많다는 친구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것이 행복하냐 그렇지 않냐는 이분법적인 해석도 의미가 없다.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삶은 새로움 그 자체다. 나이가 마흔이다. 삶의 반을 살았다. 태이와 함께 할 새로운 삶의 반도 기대가 된다.
